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사건 (문단 편집) ==== 한사군이 식민지라는 주장이 식민사학이다 ==== 2010년대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선 한 사군이 아니라 한 '''군현''' 이라는 이름을 쓴다. 그리고 그 개념은 식민지와 다른 것으로 본다. 당연하지만 일제 식민 세력 이전에 한 군현을 식민지로 보는 해석 따윈 없으나 [[식민사관]]부터 식민지로 보는 해석이 나타난 것이다. 한 군현을 식민지라 볼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유사역사학]]의 논리는 식민사학과 유사하다.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는 문헌 비판을 통한 실증을 통해 위치를 비정하고 고적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가 실증의 물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학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날의 한군현 연구에서도 중요한 선행 연구로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하지만 그들의 연구는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채 그 위치를 확인하는데 그쳤다'''는 데에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한사군 그 중에서도 400여년간 지속된 낙랑군의 군현통치가 존속 기간 내내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었는지, 심지어는 군현통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었음에도, '''그들의 노력은 오직 식민지의 공간을 확인하는 데에만 집중되었던 것이다.''' > >그들이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것은 한국이 일찍부터 외국의 식민지였다는 이해를 확산시켜 결과적으로 제국일본의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되었다. 훗날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를 비판한 일본인인 하타다 다카시(旗田巍)에 따르면 그들의 연구 자세를 제약한 것은 일본의 한국지배라는 현실이었고, 그 결과 도출된 역사상은 한국사의 진실을 놓친 그릇된 한국사상이었다.(하타다 다카시, 1983,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154쪽)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가 식민사학이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흥미로운 것은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채 그 통치의 실상 및 지배구조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위치 비정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사이비 역사학에서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또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의 이면에는 중국의 식민지였던 한사군이 현재 우리의 영토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한반도 북부에서 발견되는 고고학 자료를 모두 일제 식민사학의 조작으로 치부한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 비정을 고수하기 위해 발견된 고고자료의 해석을 거부하는 모습은 도쿄제국대학 동양사학과 조선사 담당 교수였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를 연상시킨다. 그는 대방군의 중심지가 한강 유역에 있었다는 자신의 주장에 매몰되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대방군 유물을 인정하지 않았다.''' > >사이비 역사학은 식민사학을 거부하고 또 그에 대해 가장 격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그 근간을 이루는 논리와 연구방법은 식민사학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식민사학의 목소리로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식민사학의 슬픈 변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위가야(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1[[http://www.ikaa.or.kr/webzine/read.php?pid=8&id=45&PHPSESSID=27b3468aad48569b098d5553ece57ce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